신념을 그대의 양식을 삼아라.
육신의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게 되리라.
인내를 그대의 의복으로 삼아라.
의복을 벗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지리라.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은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치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앞날을 가로막는 고난의 정체였다.
인내를 그대의 의복으로 삼아라.
의복을 벗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지리라.
인내를 벗지 않는다면 수치를 당할 일도 없으리라.
신념을 그대의 양식을 삼아라.
육신의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게 되리라.
신념을 잃은 인간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다.
실패하고 낙오하는 자들은 대개 참을성이 부족하거나 신념을 갖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던 사람들이다.
시간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게을리 걸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루하루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그날의 보람은 없다.
보람 없는 날들의 반복으로 최후의 목표가 달성될 리 없다.
위대한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을 통해 이룩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978~1860)를 가리켜 흔히들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는 60년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고, 1만 페이지가 넘는 메모와 그의 인생관을 확립시켜 준 스승인 괴테가 보낸 "당신이 삶에서 아주 작은 기쁨이라도 느끼고 싶다면 당신은 이 세계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서한들을 보면, 그는 분명 극도의 비관론자였다.
쇼펜하우어의 이같은 염세주의 성향은 그가 살아온 환경에 의해 형성된 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 어린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유럽을 누비는 사업가를 꿈꾸었지만, 열일곱 살 되던 봄에 그의 아버지는 강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또 문학적으로 야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던 남편이 사라지자 막대한 재산을 무기로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던 사춘기의 쇼펜하우어는 스스로를 햄릿이라고 부르며 평생토록 가정을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서른한 살에 그 유명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출판하며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목표했던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강당을 꽉 채울 만큼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던 헤겔과 달리 자신의 강의에는 다섯 명만 출석하는 것을 보고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1831년에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는 평소 입만 열면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선이다." 라는 염세주의 철학을 버리고 목숨을 위해 베를린 탈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마지막까지 학생들 곁에서 철학을 강론한 헤겔이 콜레라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쇼펜하우어의 이같은 모순된 행위는 평생토록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 빌미가 되었고, 이후 두 번 다시 자신의 철학사상을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 오히려 소망했기에 정반대로 고통이 부과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의 젊은 날은 사랑했기에 여인들로부터 상처받아야 했고, 지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세상의 혐오에 시달렸으며, 사람들에게 상식과 정의를 요구할 때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저서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고,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은 불안과 좌절, 고통과 절망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잊지 않고 찾아가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인생 그 자체를 텍스트 삼아 삶의 고통을 철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고통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는 '비관에 대한 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라보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그저 '인생'이라는 두 글자, 다시 말해 문자일 뿐이다.
'인생'이라는 두 글자의 뒤안길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과 의지야말로 '인생'이라는 글자로 표현된 실체이며, 그 표상을 고통으로 덧칠하는 주체도, 군대로 변화시킨 주범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 세상과 사회가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삶의 고통을 철학적 주제로 선택하고, 그 절망의 순간들을 여과하지 않고 증명하고 파헤친 쇼펜하우어의 이런 용기야말로 사후 15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우리가 고통의 한 때를 지나치며 쇼펜하우어에게 '비관에 대하 비관'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문제적인 삶을 살아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 추구에서 벗어나 어떻게 죽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떻게 파멸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되도록 빨리, 자취도 남기지 않고 이 불합리한 삶의 굴레에서 사라질 수 있기를 쇼펜하우어 스스로 갈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생전에는 그가 펼친 주장의 참된 의미가 왜곡되곤 했다.
기독교가 이단을 박해하듯 지성계는 쇼펜하우어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현대사회에서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이 단순한 철학자를 넘어서는 특정한 명칭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실존 자체를 철학의 목적이자, 궁극적인 진리로 삼은 선구자였다,
같은 시대의 철학 학자들이 철학을 위한 철학을 괴수 하고 있을 때, 쇼펜하우어만이 철학의 본질이자 철학의 구현인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결과 쇼펜하우어는 철학의 주체인 인간의 멸망을 보았고, 철학이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 철학의 죽음을 목격했다. 인간이 이룩한 문호, 문명, 기술과 법률, 정치 체계가 인간의 본질을 지워버리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 쇼페하우어의 절망이 궁극적인 완성에 도달하게 된 원인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절망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절망은 끝이 아니다.
하나의 몰락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잉태하고 태어나는 위대한 절망이다.
새로운 '나'를 위해 현존하는 '나'의 절망이 희생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의 절망은 궁극의 희망이다.
그에게 고통은 소멸해야만 끝나는 아픔이 아니다.
그 아픔 끝에 새 생명이 탄생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가치관이 나의 인생에서 성립된다.
거칠고, 때로는 표독스럽기까지 한 그의 날카로운 언어들이 우리의 시대까지 살아서 약동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이야기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를 이야기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살아남기를 소망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이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 깃든 욕망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가장 순수한 욕망에 이르렀을 때 죽음이라는 한계가 정해져 있는 육체의 삶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상'을 남기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비관론은 한 인간이 순수한 욕망으로서 세계에 남겨지기를 소원하는 모든 인간의 잠재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절망은 능동적인 절망이다.
그가 추구했던 욕망은 가장 순수한 의지였다.
인간은 욕망의 표상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욕망을 성취하고 싶어 하는 의지의 출현이다 이런 진리를 간과한 채 눈에 보이는 사태만을 쫓아다니는 우리의 무지한 삶이야말로 절망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떠나고 1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목격했던 절망이 크기는 더욱 확대되었다.
인류가 추구했던 물질만능의 시대는 인간에게 물질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생존의 가치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에게 좌절과 억압, 공포만을 보여주고 있다.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우리 시대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절망과 분노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또 한 번 쇼펜하우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점점 더 포악스러워지고, 그에 비례하여 인간성까지 날로 강퍅해지고 있으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라는 사람밖에 없다"라는 진리를 가슴에 새긴 젊은이들은 이 험한 시대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표상'으로 남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 김 욱 편역자님의 글을 옮기면서, 멋진 책을 편역 해주셔서 감사 또 감사------------------------
쇼펜하우어는 일평생 열한 권의 책을 썼고, 그중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8권이다.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
위의 문장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는 문장을 핸드폰에서 보고 쇼펜하우어에 관한 호기심에 도서관에 가서 회원을 등록하고 우선 쇼펜하우어의 저서 3권을 대출하여 "청춘독설"을 정독하면서 독설을 외치고 다녔다고 했는데, 쇼펜하우어는 누구보다도 삶을 치열하게 실존의 고통에 몸부림쳤는지 내용의 줄거리에서 충분히 느끼게 되었고, 나에게는 독설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희망적이고 긍정의 메시지로 다가왔고, 뜨겁고 가슴벅찬 감동을 받았습니다.
1831년 콜레라가 만연했을때 그는 입만 열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 고 외치던 사람이 왜 콜레라를 피해 베를린을 떠났을까?
그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것 처럼 살고싶은 무지의 욕망에서 탈출하지는 않았을것 같다.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라는 작품을 31살에 집필했고, 그때 나이가 30대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철학적 신념이 불타올라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왜곡된 비아양대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적 신념을 완성시키고자 베를린을 떠나게 되었다고 감히 독자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살고있는 현재의 삶이 끝인지, 저 너머의 세상이 있는지에 대한 심오한 내용들을 철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구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을 감내했는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은 육체라는 표상을 벗어난 영혼만이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 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육체의 표상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온전해 질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곧 정신적인 차원을 높이기 위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독자는 해본다.
결국 우리는 정신적인 차원을 높이기 위해 태어났고, 그 용도에 따라 고난과 고행을 항상 어깨에 짊어지고 삶을 살아가고, 이 삶마져도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 된다고 역설적이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사라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된다.
(어떠한 고난과 고행도 소우주인 나로부터 오고가는 즉 생각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물질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았음)는 뜻에서 감사하면서 힘듦을 마음에서 놓아야 한다는 뜻에서 감사함으로 받아 들였음을 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살기 위해서 먹어야지, 먹기 위해서 산다면 여느 동물들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이 그 일생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는 까닭은,
첫째, 그릇에 내용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내용을 준비하되 그릇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며,
셋째, 그릇에 맞는 내용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넷째, 내용에 맞는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 첫째-넷째를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이에 많은 생각을 하여 본인의 것으로 만들어 보려
노력할 것이다. 분명 지성의 한계가 있어 그릇만큼의 이해가 되겠지만 '나' 라고 하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새 옷을 입기를 희망하면서 진리를 구한 선각자로 보여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님과 만나서 반가웠고 행복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주옥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 시간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 게을리 걸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 하루하루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그날의 보람은 없다.
- 보람 없는 날들의 반복으로 최후의 목표가 달성될 리 없다.
-- 위대한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을 통해 이룩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